1974년 한국최초의 등산학교로 설립된 한국등산학교는 성실, 인내, 안전이라는 교훈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등산교육의 역사와 함께 태동한 교육기관입니다. 2017년 기준 43년간 유수의 전문산악인 배출을 비롯, 약 11,000여명의 동문들을 배출시키며 경찰특공대, 경찰산악구조대, 국립공원관리공단, 중앙소방학교 등을 대상으로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인명구조 및 산악교육을 담당해 왔습니다.
서양에서 발생한 순수한 의미의 등산이 우리 나라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일제 때인 20세기 초반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순수한 의미의 등산활동은 당시로서는 식민지 지배계층의 전유물이었다. 이는 당시 국내의 사회적 경제적 여건이 성숙되지 못한 농경사회로 등산의 일반화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등산은 산업사회의 부산물이기 때문에 국내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60년대 후반부터 일반 등산인구도 따라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비례해서 도봉산과 북한산에서 조난사고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산악계가 가진 기술과 정보는 일제 때의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 산악계에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등산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은 1969년 2월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일어난 조난사고(눈사태로 10명 사망)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때 사고는 히말라야 등반을 목표로 한 한국산악회의 훈련대가 훈련 중에 일어난 조난사고였다. 이 사건으로 일제 때에 도입된 전근대적인 적설기 등산기술이 전승되어 온 당시의 기술수준으로 히말라야 같은 고산등반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이다. 이것은 곧 등산이 의욕만으로 되는 게 아니고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다양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이 사고 전인 1964년 방한한, 1963년 미국에베레스트 원정대를 지휘해서 에베레스트 서릉과 남동릉을 종주하는데 성공한 노만 다이렌플스가 당시 경북산악연맹 회장이었던 이효상 국회의장의 초청 만찬자리에서 초청자인 이효상 국회의장의 한국산악인의 히말라야 원정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대해 한국산악인은 훈련한 산의 고도가 2000미터 미만이고 본격적인 빙. 설벽등반을 훈련할 장소가 없다는 등의 조건을 들어 히말라야에 오르고 싶다면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옆의 아일랜드피크(현재 임자체6,160m)나 시등 해보라고 권했다는 일화는 당시 국내 산악계의 수준을 극명하게 드러낸 사례였다.
1969년의 조난사고는 산악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당시 젊은이들에게는 등산이 산꼭대기를 오르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대자연 앞에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증명해 등산은 자연의 위대함에 도전한다는 이미지로 바뀌어 청소년 등산인구가 늘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사고에 이어 이듬해인 1970년 봄 조선일보사에서 파견한 히말라야 추렌히말 원정대(대장 김정섭)의 등정 의혹과 1971년 봄, 마나슬루 원정대(대장 김효섭)의 김기섭 대원의 추락사 그리고 대한산악연맹에서 파견한 로체샬 원정대(대장 박철암)의 등반 실패 등으로 자극받은 한국산악회(회장 이민재)는 프랑스 국립등산스키학교(ENSA)로 유학생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1971년 11월 첫 알프스 훈련대(대장 전담, 이재인, 한덕정, 조천용, 백인섭, 이강오, 진교춘, 구인모)가 프랑스 국립등산스키학교에 입교 3주간 동안 몽블랑 산군 일원에서 당시 최신 빙. 설벽등반 기술교육을 받고 귀국해 프랑스식과 오스트리아식 프로트 포인팅으로 구별되는 유럽의 정통 빙·설벽등반기술을 국내에 전수하는 첫 계기가 되었다.
한국산악회는 다음해(1972년) 9월초, 다시 2차 알프스 훈련대(대장 김인섭, 김항원, 차양재, 유재원)를 파견,
2주 동안의 교육을 받고 귀국 유럽정통의 빙·설벽등반 기술보급의 대중화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현실은 이런 최신 빙·설벽등반기술의 보급은 서울산악회와 설악산악회가 공동 주최한 설악산에서 겨울에만 개설되었던 겨울등산학교나 한 국산악회에서 개설하는 등산아카데미 등을 통해서 일부 소수의 산악인들만이 공유하는 극히 폐쇄적인 도제수업같은 성격 의 교육이었다.
또한 1971년 11월, 인수봉에서 대량조난(11월28일, 7명 사망, 16명 부상)과 히말라야 마나슬루에서 1971년에 이어 1 972년의 대량조난사고(눈사태로 15명 사망)로 일반인 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을 위한 등산교육의 필요성도 높아졌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1970년대 경제개발계획으로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자 전세버스나 고속버스를 이용, 더욱 먼 산으로 등산을 다녀올 수 있게 되어 대상지가 넓어지고 따라서 등산인구도 늘어났으나 늘어나는 등산인구만큼 산 에서의 무질서 등으로 인한 그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또한 앞서 언급한 대로 조난사고가 증가하기 시작했으나 이를 예방할 관계기관의 대책도 전무했다.
이를 책임져야 할 산악계 조차 이런 시대 변화와는 무관하게 보수적인 체제를 유지하고 있어 급변하는 사회변화를 수용할 능력이 전무했다. 따라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상설 등산학교의 필요성이 산악계 소장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거론되기 시작했으며 이런 소장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당시의 폐쇄적인 산악계의 체제를 혁파하고 나온 것이 바로 '한국등산학교'의 설립이었다.
새로운 시대를 위해 당시의 관습을 과감히 타파하고 설립된 한국등산학교는 당시의 개발과 재건이라는 사회분위기와도 일 치했으며 시대적인 욕구와도 맞아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본교가 개교할 즈음인 1970년대 해외 산악계는 히말라야에서 8000미터 봉우리의 벽등반 시대가 도래하여 안나푸르나 남벽과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 포위전법의 등반방식이 정점에 다 달아 있었으며 동시에 8000미터 봉우리에서 최초의 알파인스타일 등반을 성취시켜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연 때였다. 알프 스에서는 최난 루트의 동계 단독등반이 미국의 요세미티에서는 거벽의 자유등반이 시험되고 있을 즈음, 국내에서는 일부 선 각자들에 의해 겨우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상설 등산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부언 하자면 세계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프랑스 국립등산스키학교(ENSA)는 1937년 개교 하였으며 이웃 일본의 문부성(우리의 교육부 해당)산하 등산연수소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개소 하였다.
이런 나라에서는 일찍이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히말라야에 원정대를 파견하는 국가치고 국립등산학교 내지는 그에 준하는 대표적인 등산학교가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듯 국립등산학교의 존재는 그 나라의 문화척도에 영향을 줄만큼 중요한 것인데도 결국 국립등산학교가 설립되지 못하고 몇몇 개인의 뜻으로 사설 등산학교가 설립되게 된 것이다.
·한국등산학교의 개교
한국등산학교 설립의 모체는 서울산악회와 설악산악회에서 1971년 1월 초순 설악산에서 처음 개설하여 1974년 1월까지 4회를 공동 개최한 겨울등산학교다.
겨울등산학교는 현재 월간 山지의 전신인 ‘등산’지의 발행처였던 산악문화사와 조선일보사 그리고 당시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산악회였던 신우회(信友會)가 후원했다.
이 학교에 대해 월간 山(1971년 3월)지는 등산계 소식란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1월 7일부터 16일까지(9박10일) 설악산에서 개강한 제1회 겨울등산학교(교장 이기섭)가 18명의 수료자를 내고 무사히 끝마쳤다. 1월 8일 8시 설악회관에서 속초시장, 경찰서장 등 지방 유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개교한 동교는 개교 첫날 오리엔테이션을 비롯해서 수료시까지 로드 웍, 아이젠 웍, 피켈 웍, 심설기술, 조난과 안전, 일반의료, 빙벽등반, 아이스커팅, 일반기상 및 천기도 실습 등 다채로운 교과목을 가지고 진지하게 실시되었다. 이들 수강자 중에서 최고령자는 오창환(43세)이고 최연소자는 김윤기(17세), 설악산악회와 서울산악회가 주관한 이 겨울등산학교는 앞으로 해마다 갖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겨울등산학교는 당시 국내에서 가장 권위 있고 또 내용이나 체제에 있어 가장 알차다고 높이 평가받았다. 이렇듯 성황리에 개최되던 겨울등산학교는 계절에만 열린다는 단점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산악계에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사계절 열리는 상설등산학교의 필요성이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었다.
그러나 영속성을 보이던 겨울등산학교가 제4회째(기간:1974년 1월 6일 ~ 12일)를 맞이하면서 수강생 감소(20명 수료)와 함께 재정난에 봉착하게 되었다. 결국 제4회 겨울등산학교 개설 중 1973년부터 참여하고 있던 당시 서울특별시산악연맹 회장이었던 권효섭 국회의원과 겨울등산학교와 한국산악회에서 개최하던 등산아카데미를 실제적으로 이끌어 나가던 서울산악회 부회장이자 한국산악회 이사였던 안광옥, 강사로 출강하던 강호기(서울특별시산악연맹 이사)와 김경배(서울특별시산악연맹 사무국장), 김인섭(한국산악회 기술위원)등이 겨울등산학교가 가진 소규모의 배타적인 단점을 극복하고 더욱 개방적이고 체계적인 교육내용을 갖춘 상설등산학교의 필요성에 대해 같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제4회 겨울등산학교의 교육을 끝내고 서울로 올라온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저녁, 상설등산학교 설립에 공감을 하고 있던 이들 5인은 설립위원회를 발족하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그리고 각자의 업무를 분담했다. 가장 중요한 업무로 관계기관의 양해를 얻는 일이 전제되어야 했다.
이런 일은 예나 지금이나 현직 국회의원이 적격으로 관계기관 담당은 권효섭, 산악계 관계는 국내 등산교육의 선구자인 안광옥, 당시의 열악한 통신사정 때문에 서울특별시산악연맹 사무국장이었던 김경배가 연락 및 홍보를, 교육계획은 프랑스국립등산스키학교 출신인 김인섭, 이 밖의 기타 문제는 대한산악연맹에서 매년 개최하던 하계산간학교를 주도하던 강호기가 담당하기로 했다.
이후 공식 명칭을 한국 최초의 등산학교이므로 ‘한국등산학교 설립위원회’로 하고 현재 광화문 사거리의 조선일보사 옆에 있었던 서울산악회 사무실(중구 신문로 1가 153-2)과 광교의 조흥은행 본점 줄기에 위치했던 김인섭이 경영하던 등산장비점 雪山莊(중구 삼각동 21-1)을 오가며 업무를 보았다. 이때 모든 안건은 위원 한 사람이 거부를 해도 부결되는 전원 찬성의 묵계 하에 업무가 추진되었으며 추가로 설립위원에 서울대대학원 원장이었던 이숭녕 박사가 영입되고 강사로 겨울등산학교에서 이론가로 활약했던 K.C.C.(Korea Climbing Club) 멤버인 백경호(한국산악회 이사)가 합류했다.
이러한 인선작업과 함께 6월 15일 개교 예정으로 제반 준비를 진행시켜 나갔다. 먼저 교육생을 받아 교육할 교육장으로 도봉산을 택하게 된 데는 당시나 지금이나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기가 편리하고 접근거리가 짧고 공공법인(公共法人)인 서울특별시산악연맹이 관리하고 있는 도봉산장이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강사로 참여한 백경호, 이원영, 신동간, 김호진 등이 설립위원들과 함께 실기교장을 답사, 선택했다. 이러한 준비와 함께 한국등산학교 설립위원회는 5월 하순, 설립위원회 대표 권효섭, 안광옥 명의로 전국의 주요 단체와 언론기관 앞으로 한국등산학교 설립취지와 개요를 우편으로 발송하여 한국등산학교의 설립을 발표했다.
당시 발표되었던 취지문, 학교개요, 설립목적, 교과목은 다음과 같으며 취지문과 목적은 강호기, 교과목은 김인섭이 초안을 잡아서 위원회에서 최종 마무리했다.
이와 함께 제1회 초급반 모집원서 배부와 접수공고가 발표되었다. 이때 원서배부 및 접수처가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204번지 뉴光化社內’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곳은 현재 광화문지하도 세종문화회관 방향 출입구에 있는 약국자리(옛 숭문서점)에 있던 필름, 현상, 인화 접수처로 서울산악회 회원(이계환)이 운영하던 곳이었다. 이곳을 접수처로 택하게 된 것은 당시 강북의 4대문(남대문, 서대문, 동대문, 북문)안이 서울의 중심으로 그 중앙이 광화문이라 교통이 편리하고 찾기 쉽기 때문이다.
또한 학교의 교구와 시설물로 칠판과 교탁, 의자를 구입하고 야간 등화를 위해 1회 때는 지금은 자취를 감춘 카바이트등(물을 부어 아세틸렌을 발생하는 원리를 이용해 불을 밝힘)을 구입해서 그야말로 등화가친(燈火可親)의 시대를 보내고 2회 때부터 당시 직장산악인협회의 김용성 회장이 발전기를 기증해 광명(光明)을 맞이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둘째 주의 확보 실기에 사용하는 타이어는 국회 수송부에서 헌 타이어 4개를 기증 받았다. 필요한 줄은 군용 로프와 당시 국내에서 유일하게 등산용으로 생산하던 남대문시장의 설악산장 로프를 구입했다. 이 외에 필요한 나머지 장비는 참여 장사들의 장비로 보충했다.
·개교준비과정
한국등산학교의 설립이 일반인들에게 처음 알려진 것은 日刊스포츠(1974년 6월 5일)의 樂山天理난을 통해서였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등산학교가 권효섭 의원과 안광옥 한국산악회 이사를 설립위원회 대표로 하여 설립되었다. 정규 등산학교로서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열게 된 이 등산학교는 6월 15일 개교 예정으로 2일 서울 도봉산장에 사무실을 열었다.
이제까지 각 단체에서 각양각색으로 보급되어 온 등산기술을 체계화하고 “젊은 산악인들의 역량을 함양하여 산악운동의 새로운 좌표를 설정하고 정신력과 체력을 단련하여 정통적인 알피니즘을 추구, 국가민족에 기여하자는 것”이 목적으로 전국의 산악동지와 단체들의 절대적인 협찬을 얻어 문을 열게 된 것이라고 권효섭 의원은 말했다.
우선 서울 근교에서 실내강의와 옥외 등반 실기훈련장소로 가장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도봉산장을 학교본부로 하고 설악산 권금성산장과 한라산 어리목산장을 하절 전진기지로 진부령 알프스 스키장을 스키 전진기지로 정함으로써 지금까지의 후진성을 탈피하는 면목을 갖췄다. 모집요강에 의하여 초급반, 중급반, 동절반, 지도자반, 스키반으로 정원은 각 30명, 초‧중급반은 주말인 토‧일요일만으로 8박 16일, 스키동절반, 리더반은 합숙훈련으로 8박 9일, 한국등산사와 산악운동의 방향을 비롯해서 14개의 등반에 관한 이론과목과 실기를 습득하게 된다. 이번 첫 기에는 산악동호인으로 초급자를 대상으로 초급반만을 모집한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한국등산학교 설립은 전국에 알려졌다. 그리고 그 준비과정에서 국가기관의 공인을 위한 작업도 함께 병행되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사설강습소 인가문제를 중구교육구청에 문의한 결과 처음 들은 대답은 “냄비 가지고 가서 밥 지어먹고 오는 등산에도 교육이나 학교가 필요합니까?”라는 담당자의 퉁명스러운 답변이었다. 지금 같으면 수준 이하의 대답이었지만 당시로서는 등산에 대한 사회의 통념을 정확하게 보여 준 명답이었다. 당시 이러한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권효섭 의원의 노력으로 설립위원회는 개교 이틀 전인 1974년 6월 13일자로 ‘사설강습소 설립예정 인가신청서’를 북부교육구청장을 경유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 교육감 앞으로 제출했다. 이와 함께 제출된 당시의 강사 명단을 보면 권효섭, 안광옥, 이숭녕, 문우식, 김현린, 박철암, 강호기, 백경호, 김경배, 김인섭 등 모두 10인으로 작성되었다.
한국등산학교 설립위원회에서 제출한 예비인가신청서를 접수한 당시 서울시 교육감은 문교부(현 교육부)장관에게 예비인허가에 대한 문의를 하였다. 담당기관인 문교부 체육국장은 이에 대한 관할단체였던 대한산악연맹에 1974년 8월 22일자로 ‘등산학교(사설강습소) 설립에 따른 의견문의’공문을 발송하였다. 이를 접수한 대한산악연맹은 1974년 9월 11일자로 등산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배경과 교육의 방향과 그리고 외국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교육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개교한 한국등산학교 초급과정을 참고한 의견서를 첨부하여 회신하였다. 이런 내용의 회신을 접수한 문교부는 교육감에게 내용을 보완하여 신청을 승낙할 것을 통보하였다.
이 통보는 결국 북부교육구청을 통해 1974년 10월 29일자로 ‘한국등산학원설립인가’신청에 관한 통보로 전달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귀하가 1974년 6월 15일자로 제출한 ‘한국등산학원설립인가’ 신청에 관하여는 다음 요건에 의거 인가토록 시달되었음을 알리오며 소칙(교칙)을 재작성하여 제출하시기 바라며, 일건 서류를 일단 반려하오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한국등산학교가 설립된 것은 1974년 6월15일,
뜻있는 산악인들이 후배 산우들을 위한 지도교실을 세운 이래 1982년까지 1500여명의 수료자를 냈다.
개교시 학교의 조직은 초대교장에 권효섭 설립위원 대표가, 초대 부교장은 안광옥 설립위원 대표가 맡았으며 대한산악연맹에서 가맹단체회원 등산교육을 위해 매년 여름 실시하던 하계산간학교와 앞서 언급한 겨울등산학교에 깊이 관여했던 강호기 설립위원이 초대 학감을, 총무부장에 김경배 설립위원, 교육부장은 김인섭 설립위원이 맡았다.
개교 당시 참여한 강사는 5인의 설립위원(권효섭, 안광옥, 강호기, 김경배, 김인섭)과 손경석, 김원모, 이우형(작고), 백경호, 박봉래 등이 강사로 김호진, 신동간, 이원영, 홍건식, 전재운(작고) 등이 실기강사로 참여했다. 개교 후 최창민, 문남길, 김도섭, 김갑용(도미), 김시훈, 조용식(도미), 최태현, 이종수, 백동욱 등이 참여했다.
개교시의 교육과목은 산악운동의 방향(권효섭), 한국등산사(안광옥), 등산윤리(이숭녕), 보행론(김경배), 짐꾸리기(김인섭), 반공교육(치안본부 대공과), 알피니즘의 역사(손경석), 응급처치(대한적십자사), 독도법(이우형), 산악운동의 진로/초보자의 자세(권효섭), 등산용어(김원모), 자연보호론(산림청), 기초장비론(김인섭), 파트너십(강호기), 암벽등반론/확보론(백경호), 일반등산론(계획)/매듭법(강호기), 식량론(이원영), 기상학(관상대/ 현 기상청), 사진학(김조현, 이종호) 등으로 출강한 강사들의 수준은 일반 대학의 전 현직교수출신들로 이루어져 한국등산대학이라고 할 정도의 수준 높은 교육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산악교육의 완벽한 조건을 갖춘 본교가 일반교육의 잣대로 재본 결과에 따라 교육청으로부터 정식승인을 받지 못해 결국 10년간을 설립자인 초대 교장의 사회적 지위와 참여한 산악계 인사들의 인지도로 유지되고 운영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 10년 동안 몇몇 개인의 희생에 의해서 운영되어 왔다. 그런 힘든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설립시 연락처가 광교의 雪山莊에서 중구의 다동 대웅빌딩과 중구 태평로 서신빌딩 등으로 자주 바뀐 것이 재정상의 어려움을 대변해 주는 것이다.
본교가 개교할 즈음인 1970년대 해외 산악계는 히말라야에서 8000미터 봉우리의 벽등반 시대가 도래하여 안나푸르나 남벽과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 포위전법의 등반방식이 정점에 다달아 있었으며 동시에 8000미터 봉우리에서 최초의 알파인스타일 등반을 성취시켜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연 때였습니다. 알프스에서는 최난 루트의 동계 단독등반이 미국의 요세미티에서는 거벽의 자유등반이 시험되고 있을 즈음, 국내에서는 일부 선각자들에 의해 겨우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상설 등산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부언 하자면 세계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프랑스 국립등산스키학교(ENSA)는 1937년 개교 하였으며 이웃 일본
의 문부성(우리의 교육부 해당)산하 등산연수소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개소 하였습니다.
개교 후의 국내 산악계는 1977년 1월 당시 국내 산악계 최대의 과제였던 토왕성빙폭이 박영배, 송병민에 의해 초등되고 9월에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에 고상돈이 국내 최초로 오른다. 그리고 그해 수출 100억불을 달성하는 그야말로 '한강의 기적'을 이룩해 나아가던 시기였다. 따라서 1972년 마나슬루(8,163m) 대량조난으로 히말라야원정에 대해 싸늘한 눈빛을 보내던 사회의 눈도 많이 부드러워져 1980년대 초부터 국내 산악계는 히말라야 붐에 휩싸인다.
그러나 본교는 날이 갈수록 어려워져만 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수강생은 증가했으나 학교운영은 재정적으로나 인적으로 어려워져갔다.
당시의 상황을 日 스포츠(1982년 11월 10일)에 실린 '등산학교'란 표제의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등산학교가 설립된 것은 1974년 6월15일, 뜻있는 산악인들이 후배 산우들을 위한 지도교실을 세운 이래 1982년까지 1500여명의 수료자를 냈다.
도봉구 山31번지의 도봉산장을 사용하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산악인들의 순수 열의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신문기사의 마지막 구절처럼 순수 열의만으로 학교를 지탱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1983년 강호기 학감의 미국이주로 공석이 된 학감에 이우형이 취임하면서 학교운영을 활성화해 보자는 뜻으로 권효섭 교장, 안광옥 부교장, 이우형 학감, 최창민, 김경배, 문남길,이종범이 각각 50만원씩 부담하여 시청앞 부근의 서신빌딩 602호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운영비 충당을 위해 당시 등산화 제조업체인 R.F의 장경신(초급반1회) 사장의 배려로 R.F등산화 판매권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이런 시도도 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해 2년여만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의 사정에 대해 당시 월간 山의 박인식 기자는 '한국등산학교 逆境10년 다시 門을 열 것인가?' (월간 山 1985년 4월)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
"등산교육의 '정통'임을 자랑하던 한국등산학교(교장 권효섭)가 작년 6월 제20회 정규반 교육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1974년 6월 15일 개교한 한국등산학교는 지난 10년 동안 정규반 792명, 암벽반 305명, 동계반 420명, 그리고 수탁반에서 297명 등 모두 1,814명의 졸업생을 배출해 왔다. 한국등산학교에서 전문등산에 대한 기초를 다진 이들 졸업생들이 각 단위 산악회로 흡수되며 한국 산악계의 저변 확대와 등산운동의 질적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을 다들 인정하고 있었기에 등산학교의 폐교 소식은 산악계에 상당한 충격을주고 있다.
사실상 한국등산학교는 관계자 몇사람의 희생 위에 그 동안 존재해 왔었다. 사단법인 대한산악연맹과 한국산악회의 관련 부처인 체육부나 문교부로부터 행정적으로나 재정적인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몇 개인의 힘으로 10년을 끌어 왔던 것이다."
이 기사를 뒷받침하는 사례로 1984년 여름, 제14회 암벽반과 가을에 실시해야 할 제22회 정규반을 실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당시 기사 내용처럼 학교를 폐교한 것은 아니었다. 실상은 한국등산학교가 설립된 것은 1974년 6월15일, 뜻있는 산악인들이 후배 산우들을 위한 지도교실을 세운 이래 1982년까지 1500여명의 수료자를 냈다.
도봉구 山31번지의 도봉산장을 사용하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산악인들의 순수 열의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1985년 초에 재정 부족과 학교운영에 따른 문제로 인한 일시적인 휴교조치 이후 실제로 학교를 이끌어나가던 권 교장은 학교를 합법화시키고 전담직원을 두기 위해서는 본인이 회장을 겸임하고 있던 서울특별시 산악연맹 부설 등산학교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고 새 출발을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서울특별시 산악연맹은 정관 제4조 제6호 및 제47조의 규정에 의거 '한국등산학교 설치규정'을 1985년 4월 3일자로 제정하고 조용식 시연맹 사무국장을 1985년 5월 6일자로 등산학교 교무주임에 임명하여 겸직하게 하였다.
등산학교는 임원진과 강사진을 소폭으로 개선, 산악인들의 요청에 부응하기로 했으며 또한 한국등산학교 설치규정에 따라 등산학교 후원회와 별도로 자문위원회(이우형, 최창민, 이종범, 문남길)가 구성되고 임직원으로 권효섭 교장, 최석모 총무이사가 담당이사로 겸직했다.
새롭게 출발한 본교의 학과목과 담당강사는 산악운동의 방향(권효섭), 한국등산사(안광옥), 등산윤리(이숭녕), 짐 꾸리기(이성환), 보행론(문남길), 막영법(이종범), 조난대책(이우형), 기상학(이우형), 매듭법(김종욱), 기초장비론(문남길), 파트너십(박봉래), 알피니즘의 역사(손경석), 암벽등반론(김종욱), 확보론(문남길), 등산의학(장경덕), 자연보호론(내무부 자연보호 담당관), 등산식량(신동간), 등산용어(김원모), 독도법(이우형), 사진학(이종호), 구급법(대한적십자사), 암벽등반론(김경배), 특강(김영도) 등 이렇게 다시 편성된 학과목 중 그해 가을 제23회 정규반에서는 자연보호론은 산림청에서 내무부 자연보호 담당관으로, 기상학은 현재 기상청인 중앙기상대에 협조를 의뢰 예보과에서 강의를 맡게 되었으며 사진학은 이훈태와 백승기로 강사가 바뀌었다. 치안본부 대공과에서 담당했던 반공강의는 1981년 봄, 이숭녕 박사의 등산윤리는 1985년 가을부터 시대 변화에 따라 폐강되고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지휘했던 김영도 대장의 특강이 신설되었다.
또한 1986년 가을(제25회 정규반) 체력관리(정충구), 1990년 봄(제32회 정규반) 산악도서소개(김법모), 1991년 봄 (제34회 정규반) 암벽 그레이드 및 스포츠클라이밍(홍옥선) 과목이 신설되었다. 교무주임이었던 조용식 후임으로 1987년 봄(제26회 정규반)부터 1988년 1월(제13회 동계반)까지 권순호가 1988년 봄(제28회 정규반)부터 1989년1월(제14회 동계반)까지는 이규한이 맡았다.
1989년 봄(제30회 정규반) 부터 1990년 1월(제14회 동계반) 까지 김정호, 1990년 봄(제32회 정규반) 부터 1991년 봄(제34회 정규반) 까지 전영래가, 1991년 여름(제20회암벽반) 부터 현재까지 서성식이 본교 실무를 처리해 오고 있다. 서울특별시 산악연맹 교육기관으로 편입된 직후부터 1992년 1월까지 최석모 부회장(현 시연맹고문)이 교육담당 이사를 겸직했으며 후임으로 이종범 이사가 교육이사를 담당하고 있다.
정규반의 실기교장은 개교시 본교 교사의 남쪽 아래 계곡 일명 짱구바위 부근의 바위를 이용하다가 장비의 발전 등으로 점차 북상, 현재처럼 교사 북쪽까지 진출해서 사용하고 있다.
정규반 입교생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4주차의 백운대 진출은 1974년 가을 제2회 초급반부터 시작되었다. 이 교장은 1974년 여름 이곳으로 하산하던 백경호 강사가 발견, 강사들이 점검한 뒤 교장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5주차 일요일 아침, 도봉동 버스종점에서 19번 시내버스를 대절 우이동으로 이동해서 교육을 실시하다가 1985년 봄부터 아침체조 대신 관음암을 거쳐 우이주능선을 통해 우이동으로 이동했다. 1986년 여름 제15회 암벽반에서 야간등반 및 비박교육을 해본 결과에 고무되어 1987년 봄부터 시기를 4주차로 변경하여 토요일 이론 강의가 끝난 22시부터 관음암을 거쳐 우이주능선아래 계곡에서 비박후 우이동을 거쳐 백운대로 진출하는 것으로 현재까지 실시하고 있다.
암벽반은 여름에만 개설되는 강좌로 주로 지방에 거주하는 이들과 정규반을 수료한 이들을 대상으로 암벽등반 기술습득 차원에서 실기 위주의 교육이 실시된다. 개교 후 지금까지 설악산 권금산장을 교사로 하고 주변 암벽에서 실기를 연마하고 있으나 1983년 제13회 암벽반은 유일하게 북한산 백운대에서 실시되었다. 그리고 지난 1986년 여름 제15회 암벽반에서 처음으로 야간등반과 비박을 실시했다. 그리고 1995년 여름 제24회 암벽반부터는 교육 닷새째 새벽 권금산장을 출발 도보로 울산암까지 진출한 뒤 조별로 암벽등반을 실시하고 다시 권금산장으로 귀환하는 교육과정이 신설되었다.
동계반 역시 지방에 거주하는 이들과 정규반이나 암벽반을 수료한 이들 뿐만 아니라 빙벽등반과 동계등반 기술을 배우고 싶은 산악인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교육으로 개교시부터 플랫푸팅(일명 프렌치 테크닉) 기술 위주의 기술을 교육했으나 1980년대 중반부터 외국의 등산장비 수입 자유화로 특수한 등산장비 구입이 쉬워져 1986년 겨울 제11회 동계반부터 프론트 포인팅(일명 오스트리아식) 기술이 정규과목으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겨울철 이상난동으로 설악산에 얼음이 얼지 않고 눈이 오지 않아 1988년 1월 13회 동계반은 속초해수욕장 모래사장에서 아이젠을 착용하고 교육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설악동 부근에 눈이 귀할 경우 근처 논바닥에서 교육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1993년 1월 열린 제18회 동계반은 계속된 폭설로 인한 눈사태의 위험때문에 양폭산장에 고립되었으며 15일 새벽에 일어난 눈사태에 매몰된 광주보건전문대생 5명을 강사와 학생 전원이 구조작업에 나서 구조했으나 1명은 끝내 사망했다. 이 사고로 다음날인 수료식날(일요일) 하산,일요일밤에 설악동을 출발 월요일 새벽에 서울로 귀경한 적도 있었으며,1998년 1월 열린 제23회 동계반은 설악산 일원에 내린 폭설로 인해 양폭산장 진출을 못하고 설악동의 동산장여관에서 숙박하며 설악동 근처에서 교육한 개교이래 최초의 기록을 세웠다.
본교에 유학한 외국학생으로는 1982년 1월 제8회 동계반에 대만의 건행등행회(中華民國建行登行會)의 회원 8명이 있다. 이들은인솔단장 관진민(關振民)을 비롯 9명이 내한하여 단장을 제외한 8명과 현지 교민 곽정관 씨가 매니저 겸 통역으로 교육에 참가했다. 교육 중 노방가(盧芳嘉)학생이 빙벽에서 미끄러져 다리를 다치기도 하였으나 모든 과정을 8명 전원이 수료했다. 이들은 귀국 후 감사장을 보내왔다.
이렇게 조금씩 변화해 오면서 어느덧 본교는 개교 2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개교일자에 맞추어 당시 입교생인정규반 제40회 학생들과 본교 졸업생 그리고 산악계를 비롯한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1994년 6월 15일 오후 6시 30분 강남구 역삼동의 반도아카데미에서 성황리에 개교 스무돌 행사를 치루었다.
또한 개교 20주년 기념으로 본교에 관한 언론기관의 보도내용과 그 밖의 자료를 모아 소책자인 '스무돌'을 발간했으나 급히 제작하느라 여러 가지로 부족한 책이 되고 말았다. 이로부터 3년 후인 1997년 5월 7일, 대한산악연맹이 각 시도연맹에서 운영하는 등산학교의 운영의 통일을 위해 1996년 11월 6일자로 시달한 등산교육기관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규정에 따라 서울특별시 산악연맹 이사회에서 한국등산학교 설치규정을 개정했다. 따라서 학교 육성발전과 운영을 협의하기 위하여 운영위원과 자문위원 제도를 신설하고 학교 임원중 교감, 교무주임, 서무직원, 교관의 직책을 폐지하고 교무담당, 실기담당, 서무담당으로 축소 개편하였다.
또한 1997년 5월 6일, 서울특별시 산악연맹 제5차 이사회에서 의결된 한국산악연수원 설치규정은 이를 폐지하고 이 규정을 준용토록 했다. 이에 따라 1997년 9월 1일자로 운영위원에 이인정, 강호기, 최석모, 김영기(북한산국립공원 관리소장)가 추대되고 교무담당 이종범, 실기담당 문남길, 서무담당 서성식이 위촉되었다.
이에 앞서 1997년 8월 8일자로 유창서, 장봉완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하였다.
그리고 1996년 가을 제45회 정규반부터 성적이 우수한 수료생에게 수여되는 서울특별시 산악연맹 회장상, 대한산악연맹 회장상,한국산악회 회장상이 신설되었다.
1997년 4월에는 제24회 정규반 수료생 답사부터 제22회 동계반 수료생 답사까지 모아 '둥지를 떠나면서 남긴 辭綠'을 발간했다.